프로이트는 누구인가 2
프로이트는 처음부터 아주 "잘 나가던" 의사가 아니었다. 프로이트는 자기와 같이 의사가 된 동기들 중에 가장 늦게 "교수 (Professor)" 라는 타이틀을 받았다고 한다. 의사에게 교수라는 명칭이 그 당시 오스트리아 에서 무슨 대학에 소속되는 직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정부에서 주는 자격증 같은 것인 듯싶다. 그나마 청탁도 넣고 해서 얻었다고 한다. 프로이트의 치료 방법 정신분석 을 주류 사회가 잘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또 병아리 의사 시절 코카인의 효과를 경험하고 그것이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해서 그에 대한 논문을 발표해 유명해지려고 했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고 중독성 같은 코카인의 후유증에 대하여 몰랐던 것이다. 프로이트가 쓴 편지에 의하면 그는 남들에게 인정받고 유명해지고 싶은 동기가 강했다고 한다. 모르핀 중독으로 고생하는 친구에게 코카인을 처방해 더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기도 하고 자기 약혼녀에게도 권했다고 한다. 코카콜라도 처음엔 코카인을 원료로 만들었다 하니 프로이트만 무식했다고 하기 어렵다.
처음부터 프로이트는 관련 학계에서는 잘 인정해 주지 않았고 대신 일반인들과 문화/예술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프로이트를 학계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해 준 곳은 대서양 건너 미국의 클라크 대학교 (Clark University) 이었다. 그곳에 가서 강연도 하고 명예박사 학위도 받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당시에 권위 있는 학자들이나 주류 의학계에서 인정하거나 말거나 프로이트의 명성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당시에 유럽의 카페에 앉아있으면 프로이트에 대한 대화가 꼭 들려 왔다고 한다.
프로이트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프로이트 집에 모여 그의 정신분석학을 배우고 토론하는 모임도 생기고 그 모임을 바탕으로 국제 정신분석학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처음에 프로이트를 추종하던 사람들 중에 프로이트의 권위에 도전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정신 치료 이론을 만드는 사람도 생긴다. Alfred Adler (1870 1937) 는 프로이트의 집에 모여 정신분석학을 배우고 토론하던 의사 중 하나였는데 결국 잠재적 성욕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프로이트의 이론에 반발하고 나가 독자적인 이론을 만들어 나름대로 이름을 날린다. 특히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인 융 (Carl Jung) 의 반란은 프로이트에게 큰 타격을 주게 된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이 비엔나에 사는 유대인 의사들을 넘어서서 전 세계로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비 유대인이며 스위스에서 활동하는 정신과 의사인 융에게 자기가 창립한 정신분석학회의 회장을 맞기면서 "총애"를 했다. 일종의 사도 바울의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 것인데 융도 결국 프로이트의 성 동기에 중점을 둔 "교리" 에 반발하고 독자적인 정신분석학을 주창하게 된다. 어떤 신학자들은 사도 바울도 예수의 본래 의도와는 다른 종교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런 식이 된 것이다.
그래도 프로이트와 그의 정신분석학 "복음" 은 널리 퍼져서 결국 주류 사회도 프로이트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미국과 유럽 각지에 정신분석학회가 창설되고 권위 있는 괴테 상을 받기도 하고 영국 왕립과학원 회원으로 추대되었으며 그의 고향 동네는 프로이트의 생일에 맞춰 축제를 벌이기도 한다. 프로이트가 아쉬워 한 것이 노벨상을 못 받은 것이다. 프로이트의 측근들은 그가 노벨상을 받게 하려고 여러 유명 인사의 추천장을 받았는데 아인슈타인은 끝내 추천장 쓰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프로이트에 대하여 인간적으로 호의적이었지만 정신분석학은 비과학적이라고 보았다. 정신분석학 이론이 약간 "사기성"이 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 외에도 비트겐슈타인이라든가 포퍼같은 당대의 철학자들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비판적이었다.
프로이트의 명성은 그와 그의 가족의 목숨을 나치로부터 구한다. 나치가 오스트리아 정권을 잡게 되자 문자 그대로 길거리에서 몰매를 맞아 죽은 유대인들도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를 나치 치하에서 구해내려고 여러 나라 인사들이 나서는데 그 중에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의 이름도 끼여 있다. 프로이트가 82 세가 되던 해에 프로이트는 가족과 함께 간신히 영국으로 도피한다.
런던으로 피신해서1년 뒤 프로이트는 사망한다. 프로이트는 좋게 말하면 애연가였고 나쁘게 말하면 시가 중독자였다. 하루에 시가를 스무 개씩 피웠다고 한다. 시가하나가 담배 한 갑과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담배12 개피에서 70개비까지 여러 가지 주장이 있긴 한데 니코틴 함량으로 12 개비 정도가 맞는 것 같다) 그 말대로라면 하루에 담배 2보루 정도씩 핀 셈이다. 시가라는 게 일반 담배에 비해 너무 독해서 내 경험상으로는 들여 마시지 않고 그냥 뿜어내는 "뻐끔" 담배 식으로 많이 핀다. 프로이트도 그랬을까? 프로이트는 폐암엔 걸린 것이 아니라 구강암에 걸려서 고생을 많이 하는데 오랜 기간에 걸쳐 수술도 많이 하고 고통에 시달렸다. 그랬는데도 거의 죽을 때까지 시가를 끊지 못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그 당시에 83세까지 산 것을 보면 시가 때문에 일찍 죽었다고 하기도 어렵지만 죽기 1년 전까지 저술을 하고 환자를 보다가 마지막 수술을 받은 후 기력이 쇠해 결국 생을 마감하다.
프로이트는 사람들이 담배 피는 것을 정식분석학 적으로 자위행위의 대체 행위로 분석했다. 그런데 아무리 정신 분석해 봤자 담배 끊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구강암으로 고통을 받던 프로이트는 담당 의사에게 자기가 더 희망이 없을 때가 되면 억지로 생명을 연장시키려 하지 말고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부탁해서 약속을 받아 내었고 프로이트의 의사는 그 약속을 지켜서 딸과 상의한 뒤 모르핀을 몇 차례에 걸쳐 주사하여 안락사를 시켰다. 프로이트는 존엄사의 선구자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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