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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만과 핵폭탄 그리고 6.25

by 심려자 2009. 4. 4.




트루만과 핵폭탄 그리고 6.25

 

한국 전쟁에 대하여 참전 미군의 시각으로 쓴 책 '가장 추운 겨울'  을 읽은 뒤 미국 33대 대통령 트루만의 전기를 구해 들었다 (Truman by David McCullough, 오디오 북).   이 책은 나온지 오래된 책인데 (1993년 첫 출판) 저자는 이 책으로 퓰리처 상을 받았다.   트루만 (Harry S Truman 1884-1972) 은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미국의 참전을 결정하기도 하고 또 확전을 원하던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면서 한국전의 휴전을 결정한 사람이다.  그는 또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비록 적국이긴 했지만 아이들을 포함한 수십만명의 민간인들의 목숨을 일시에 증발시키는 결정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트루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뜻밖에도 트루만은 상당히 온순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카리스마라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트루만은 자기가 잘났다는 의식이 별로 없고 남들도 그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보통사람 이었다는 것이다.  가난한 농촌 소년이었던 트루만은 공부를 잘하는 편에 속했는데 돈이 없어 대학에 가지 못하고 농부가 되었다. 그러다 1차 대전이 터지자 트루만은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입장이었는데 자원 입대를 한다.  사병으로 근무할 것을 기대하고 입대했는데 뜻밖에 장교로 임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분위기가 미국 독립 전쟁 때 분위기여서 징병관의 재량에 따라 경력을 보고 장교로 배정하기도 하고 사병으로 배정하기도 했다고 한다.  트루만은 그래서 유럽으로 가 독일군과 싸우게 되는데 초급 장교로서 나름대로 공도 세워 나중에 정치를 시작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한다.

 트루만은 순정파 남자로서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학교 여학생 엘리자베스 (베스) 에게 수년간에 걸쳐 연애 편지를 보내 구애했다고 한다.  부자집 딸이었던 베스는 가난한 농촌 총각의 구애를 거절했는데 그래도 친구로라도 지내자며 계속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트루만은 연애 편지를 아주 잘 썼던 모양이다.  결국 감동한 그 여자는 트루만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낭만파 트루만은 자기가 전쟁 (1차 대전) 에 나가게 되자 결혼을 연기하자고 했다고 한다.  자기가 죽으면 불행해 질 테니 자기가 살아 돌아오면 결혼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전쟁이 끝나 돌아온 트루만은 베스와 결혼한다.  트루만의 장모는 자기 딸이 지체가 낮은 남자와 결혼했다는 생각을 트루만이 대통령이 된 후에 화이트 하우스에 함께 들어와 살면서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에 돌아온 트루만은 양품점 가게를 열어 운영하다가 당시 미주리주 정계를 뒤에서 좌지우지하던 부패한 정치 보스의 눈에 들어 정치에 입문하는데 결국 상원의원까지 올라간다.  트루만은 부패한 정치 보스가 천거해 정치를 시작했지만 정직하고 청렴했다고 한다.  루즈벨트가 네번째로 대통령에 출마할 때 민주당 내에서 부통령 후보를 놓고 고심하다가 가장 야심이 없어 보이는 트루만을 골랐다고 한다.  트루만은 건강이 나빠보이는 루즈벨트가 죽을까봐 걱정을 하며 부통령이 되었는데 결국 석달도 안되어서 사망한 루즈벨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다. 

 트루만은 취임사에서 자기보다 더 대통령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백만명이 넘을 것이라고 얘기하는데 실제로 트루만은 자기가 2 차 대전을 수행 중인 미국의 대통령 직을 잘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고 한다.  2차 대전을 마무 짓는 포트담 회담에서 처칠과 스탈린을 만났는데 스탈린은 사석에서 트루만을 평하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 (worthless) 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랬던 트루만은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핵무기 사용을 결정하고 한국전 참전을 결정하는 등 미국 대통령 치고도 아주 중요한 역사적 결정들을 수행하게 된다.

 트루만은 예상 외로 트루만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것에 대하여 크게 고민하지도 않았고 후회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히로시마에 떨어트린 핵폭탄이 예상보다 더 위력을 발휘하자 오히려 이제 전쟁이 끝나겠구나 하고 기뻐했다는 것이다.  핵 폭탄 사용을 결정할 때 일부 과학자나 참모들은 대도시말고 무인도 같은데 투하해서 원자폭탄의 위력을 과시함으로써 항복을 얻어내자 라는 의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참모들과 과학자들은 “충격 요법” 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원자폭탄을 사용하기 전에도 무수한 무차별 공습으로 일본의 여러 도시에서 수만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하는데도 일본이 전혀 항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또 일본군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항복하지 않고 싸우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미군의 인명 피해가 컸다는 것 등이 그런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원자폭탄을 두번이나 사용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원래 교토도 원폭 후보 도시였는데 당시 미국 전쟁 주무 장관이던 사람이 신혼 여행을 교토로 다녀온 바 있어서 그 도시를 좋아했기 때문에 대상에서 빠졌다고 한다.  또 당시 폭탄이 터진 뒤에 남는 방사능의 위험에 대하여 잘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원자폭탄 개발에 관여했던 과학자들 중 많은 사람이 방사능 노출의 후유증으로 암에 걸려 죽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 내에서는 원자 폭탄을 두번이나 맞은 뒤에도 끝까지 싸우다 다 같이 죽자라고 주장한 지독한 장군도 있었는데 결국 일본 왕이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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