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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통령들 (3) 토마스 제퍼슨

by 심려자 2009. 4. 24.




미국의 대통령들 (3). 토마스 제퍼슨

 

미국 최고의 대통령이 누구인가에 대하여선 시시 때때로 실시되는 여론조사도 있고 역사학자 같은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조사도 있는데 대체로 링컨, 워싱턴, 루즈벨트 (프랭클린) 의 뒤를 이어 제퍼슨 (Thomas Jefferson, 1743 – 1826) 이 거론된다.  제퍼슨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대체로 두가지가 거론되는데 미국 독립 선언서의 저자라고 인식과 미국의 영토를 두배로 늘렸다는 것이다. 

 

3 대 대통령 제퍼슨이 미국 독립선언서의 초안자인 것에 대해서는 물론 이견이 없지만2 대 대통령 아담스의 의견대로 그가 독립 선언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의 역할이 실제보다 과대 평가된 것은 사실이라고 보여진다.  아담스를 포함한 식민지 의회 지도자들은 먼저 벤자민 프랭글린에게 초고를 부탁했는데 프랭클린은 자기 원고가 의원회의 수정을 거치는 것이 싫다고 거부했고 아담스 자신은 “더 중요한 일” 때문에 바빠서 젊은 제퍼슨에게 맡기었다고 한다.  나중에 사람들이 제퍼슨을 독립선언문의 저자라고 떠 받드는 것을 보고 후회했을 것이다. 

 

독립선언서라는 것의 주 내용은 영국왕이 미 식민지에 대하여 실시한 여러가지 불공정한 정책을 나열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는 미국인들이 많아서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퍼슨은 독립선언문 초반부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삶에 대한 권리와 자유에 대한 권리와 행복 추구권을 가지고 있다” 라고 쓴다.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이 구절은 당시에 유행하던 계몽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그냥 멋을 내려고 쓴 것인지도 모르고 선언 직후엔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결국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바탕이 되고 전세계적으로 왕정 대신 민주주의가 정치체제의 주류가 되는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제퍼슨이 이런 평등 논리를 신봉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입으론 만민 평등을 얘기하고 장기적으로 노예 제도가 없어지길 바란다고 얘기하였지만 스스로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고 실제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쪽으로 국가 정책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퍼슨의 사람됨을 “이중적” 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제퍼슨은 노예들을 집 안팍 일만 시킨 것이 아니라 침대 위에서도 일을 시켜서 여러명의 아이를 낳았다.  제퍼슨의 침실 노예겸 소실은 샐리 해밍스라는 여자인데 사별한 아내의 이복 동생이자 몸종이었다고 한다.  샐리 해밍스의 아버지가 제퍼슨의 장인이었고 어머니가 장인 소유의 노예였다는 것이다.  샐리 헤밍스는 “아주 놀라울 정도로 매력적” 이었다고 한다.   제퍼슨이 해방시킨 유일한 노예는 헤밍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이들이었다. 

 

제퍼슨이 이중적이라는 말을 듣는 또 다른 이유는 겉으로는 자기를 국무장관에 임명한 워싱턴에게 충성적인 척 하면서 뒤로는 워싱턴과 그 추종자들이 왕정체제로 바꾸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비방하고 다녔다는 점이다.  (실제로 워싱턴이나 그의 측근들이 워싱턴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당시 미국의 정계는 친영파이자 중앙(연방)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자는 파벌 (Federalist) 과 친불파로서 지방 (주)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파벌 (Republican) 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제퍼슨은 후자의 당수 격이었다.  당시 신생 미국의 입장으로는 중앙정부가 제대로 서야 재정적으로도 안보적으로도 나라가 유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버지니아 출신 제퍼슨은 중앙정부의 권한 강화를 기를 쓰고 반대한다.  그 이유는 중앙집권 파가 득세하면 연방정부가 주정부에게 노예 폐지를 명령할 가능성이 있고 그러면 버지니아를 포함한 남부 농업 중심 주들은 경제적으로 파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예제도를 유지하기 의해 연방 파에 대해 반대한다고 하면 명분이 서지 않기 때문에 연방파 (중앙 집권주의자) 들이 왕정을 꿈꾸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근거 없는 명분을 들고 나온 것이다.

 

제퍼슨의 이야기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첫째 제퍼슨은 정략적으로 반대파들이 왕정체제를 꿈꾼다고 남들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지금 미국의 일부 보수인사들은 오바마가 공산주의자라고 믿는 것과 같은 심리 상태라고 보여진다.  제퍼슨같이 똑똑한 사람도 정적에 대하여 생각할 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실제보다 훨씬 더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로 제퍼슨을 이중적이라고 볼 수 있고 또 그래서 나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모든 정치인들이 아니 모든 사람들이 이중적이고 삼중적이고 또 다중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후세 사람들이 존경할 정치적 위인을 만들려면 어느 정도 약점은 적당히 눈감아 줄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제퍼슨의 자기의 묘비에 (1) 독립선언서의 저자 (2) 버지니아 종교 자유 보장법의 저자 그리고 (3) 버지니아 대학의 창립자라고 쓰도록 했다.  제퍼슨이 미국 영토를 두배로 늘린 것을 자기의 주요 업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 보면 솔직한 자기 평가이다.  미국 독립전쟁 직후 미국의 영토는 플로리다 뺀 동부 해안가와 근처 내륙 지방으로서 대충 현재 영토의 1/3 도 훨씬 못 미치는 정도였는데 당시 프랑스 소유였던 미국의 중부 지역을 나폴레옹으로부터 헐값 (2천만불 정도) 에 사들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제퍼슨이 잘해서라기 보다는 프랑스가 태평양 건너 있는 땅을 관리하기 어려워서 팔아버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미국이 지금 같은 대국이 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지만 제퍼슨은 자신의 대표적 업적이라고 여기지 않은 것 같다.

 

또 제퍼슨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한 종교에 예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미국 헌법에 신 (God) 이라는 단어 자체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데 일조했다고 한다. (이 점이 제퍼슨에 대해서 제일 맘에 드는 점이다.)  또 버지니아 대학을 만들면서 철저하게 비 종교적인 대학이 되도록 신경을 썼다고 한다.  그때까지의 전통적으로 대학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성직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는데 제퍼슨은 아예 버지니아 대학에 신학과도 만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원래 미국의 국립 대학을 만드는 것은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꿈이었다고 한다.  워싱턴은 그 꿈을 이루지 못했고 제퍼슨도 버지니아 대학을 국립 대학으로 만드는 데는 실패했지만 버지니아 대학은 대신 미국에서 가장 좋은 주립 대학 중 하나가 되었다.

참고서적:

Thomas Jefferson: Author of America by Christopher Hitchens 2005

American Creation: Triumphs and Tragedies at the Founding of the Republic
by Joseph J. El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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