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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뉴저지 역사 기행

by 심려자 2020. 12. 23.

뉴저지 역사 기행

미국에 살면서 직장은 늘 뉴욕시나 뉴욕주에 있었지만 거주지는 주로 뉴저지였다. 뉴저지는 한때 뉴 네덜란드라고 불렸다 한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처음 이 지역을 침략했기 때문이다. (맨해튼은 뉴암스텔담이었다.) 이후 영국에게 빼앗겼고 이름이 뉴저지로 바뀌었다. 영국의 저지 섬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내 생각엔 최소한 미동부에선 뉴저지가 한국 사람들이 제일 살기가 편한 곳이다. 뉴저지는 경기도의 두배 정도 넓이 (남한의 ¼) 로 남북으로 대서양 해변 따라 길게 뻗어 있는데 뉴욕시로 출퇴근이 가능한 동북부 지역 (Bergen county 와 인접 지역) 이 인구도 제일 많고 재미 동포도 제일 많은 지역이다. 이 지역이 그렇게 된 주요 이유는 "조다리", 조지 워싱턴 다리 때문이다. 허드슨 강을 넘어 맨해튼과 뉴저지를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이자 (터널은 두개 더 있지만) 세상에서 교통량이 제일 많다는 이 다리는 나도 출퇴근 때마다 건너는데 1931 년에 만들어졌다는 게 믿어지질 않는다. 

조지 워싱턴 다리는 초대 대통령이자 독립 전쟁의 영웅의 이름이 붙여져 있지만 사실 워싱턴이 패퇴한 지역에 세워져 있다. 독립군을 이끌고 맨해튼에 주둔해 있던 워싱턴 장군이 역사적 규모의 대함대를 이끌고 나타난 영국 진압군 규모에 놀라 야밤 도강한 곳 위에 세워져 있다. 다리의 뉴저지 쪽에 위치한 타운 이름이 포트리 (Fort Lee) 이다. 독립군의 방어 진지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포트리는 뉴저지의 대표적인 한인 타운 중 하나이다. 2010 년도에 약 24% 가 한인 이었으니 지금은 더 많을 것이다. 뉴저지의 많지 않은 자랑 중 하나가 토마스 에디슨인데 그가 만든 영화용 카메라 덕분에 포트리는 20세기 초반에 영화 산업의 시작지이자 중심지가 되었다.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던 배우들이 근처에 있었던 것도 포트리의 영화 산업이 발달하게 된 하나의 요인이었다고 한다. 10개가 넘는 영화 스튜디오가 있었던 원조 헐리우드였던 셈인데 이 영화사들이 몽땅 다 진짜 헐리우드로 이사한 이유는 날씨 때문이었단다. 헐리우드는 당시 포트리에 비해 땅값도 싸고 날씨도 따뜻했는데 1차 세계대전 여파로 난방용 석탄까지 구하기 어려워지자 포트리 영화 시대는 추운 겨울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뉴저지서 한국 식당 가자고 약속장소 정할 때 포트리 쪽으로 갈까 팰리새이즈 팍 쪽으로 갈까 고민하게 되는데 팰팍은 시장부터 한인 (Korean-American) 이고 인구도 반이상이 한인이다. 팰팍을 대표하는 브로드 애비뉴의 양쪽엔 한국 식당, 한국식 카페, 빵집, 미용실, 노래방 등등이 늘어서 있다. 미국서 첫번째 한인 상원의원이 나온다면 뉴저지 주 일것이다.

뉴저지 얘기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Atlantic City 이다. 한때 동부의 라스베가스라고 불리며 1980-90년대엔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지 중 하나였다. 그 인기의 비결은 미 동부에서 유일하게 도박장이 합법화 되어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유학생들도 많이 갔고 도박 때문에 실제로 학위를 받는데 지장이 있었던 친구도 있었다. 애틀랜틱 씨티는 인접 주들이 도박장을 합법화 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애틀랜틱 시티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에도 휴가지로 크게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비결은 교통과 술이었다. 뉴욕시와 필라델피아 같은 대도시 근처의 바닷가 휴양지였고 근처 다른 바닷가와는 달리  철도가 연결되어 있었으며 미국 금주령 기간 중엔 술을 파는 것을 묵인해 준 것이 성공의 비결이었다. 그런데 금주령은 폐지되고 자동차와 비행기 등 운송 수단의 발달로 플로리다를 포함한 다른 바닷가 휴양지와의 경쟁에서 밀려서 쇠퇴했다. 술과 도박으로 두번의 전성기를 누렸던 아틀랜틱 시티는 이제 무슨 카드로 재기를 시도할지.